우리 주방에는 보통 세 가지 종류의 설탕이 있습니다. 하얀 백설탕, 노란빛의 황설탕, 그리고 진한 색의 흑설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셋의 차이를 단순히 ‘색깔’이나 ‘정제도’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흑설탕은 정제를 덜 해서 건강에 더 좋은 것이 아닐까?”라고 막연히 추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적어도 현재 국내에서 시판되는 대부분의 설탕은 ‘건강’의 차이가 아닌, ‘풍미’와 ‘용도’의 차이입니다. 이 세 가지 설탕의 진짜 차이는 원당(사탕수수 원액)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당밀(Molasses)’의 함량 차이에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설탕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그 차이가 요리와 베이킹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설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당밀(Molasses)의 비밀
모든 설탕은 사탕수수에서 나옵니다. 사탕수수를 압착해 얻은 즙을 끓이고 정제하여 ‘원당’을 만듭니다. 이 원당은 순수한 당 결정과, 당밀(Molasses)이라는 끈적한 시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원당에서 당밀을 얼마나 제거하느냐, 혹은 얼마나 다시 첨가하느냐에 따라 세 설탕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 백설탕 (정백당): 원당을 원심분리기에 넣어 당밀을 완전히 분리하고, 활성탄 등으로 남은 색소까지 완벽하게 정제한 것입니다. 순도 99.9% 이상의 순수한 자당(Sucrose) 결정체입니다.
- 황설탕 (중백당): 백설탕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금 덜 정제된 것이 아닙니다. 백설탕에 당밀을 소량 다시 첨가하여 색과 풍미를 입힌 것입니다.
- 흑설탕 (삼온당): 황설탕보다 더 많은 양의 당밀을 첨가하고, 때로는 캐러멜 색소 등을 더해 특유의 진한 색과 강한 풍미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황설탕과 흑설탕은 백설탕보다 ‘덜 정제된’ 건강한 설탕이 아니라, 백설탕을 기반으로 ‘풍미를 가공한’ 설탕입니다. 당밀에 미네랄 등이 미량 포함되어 있지만, 그 양은 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닙니다.
이들의 차이는 영양이 아닌 풍미, 색, 수분 함량입니다.
2. 세 가지 설탕의 특징과 활용법
각 설탕은 고유의 특징을 가지며, 그에 따라 쓰임새가 명확히 구분됩니다.
1. 백설탕 (White Sugar)
- 특징: 순수한 당이므로, 잡미(雜味)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깔끔하고 깨끗한 단맛만을 냅니다.
- 장점: 재료 본연의 색과 맛, 향을 전혀 해치지 않습니다.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우러집니다.
- 요리 활용법:
- 재료의 색을 살려야 하는 맑은 국, 나물 무침.
- 과일 본연의 향이 중요한 과일청, 잼, 피클을 만들 때.
- 베이킹 활용법:
- 시트의 색이 하얗게 나와야 하는 엔젤 푸드 케이크, 제누와즈.
- 달걀흰자 거품(머랭)을 만들 때 (불순물이 없어 안정적인 거품이 남).
- 바삭한 식감의 쿠키를 만들 때.
2. 황설탕 (Yellow Sugar)
- 특징: 소량의 당밀이 포함되어 있어, 백설탕보다 습기를 조금 더 머금고 있습니다. 은은한 캐러멜 향과 부드러운 풍미가 있습니다.
- 장점: 요리에 적당한 감칠맛과 윤기를 더해줍니다.
- 요리 활용법:
- 한국 요리에서 가장 범용적으로 쓰입니다.
- 조림, 볶음, 불고기 양념 등 단맛과 함께 약간의 풍미와 색을 더하고 싶을 때 좋습니다.
- 베이킹 활용법:
- 일반적인 쿠키, 머핀, 파운드케이크 등 가벼운 풍미를 더하고 싶을 때 사용합니다. 백설탕 대신 사용하면 조금 더 촉촉한 식감을 줍니다.
3. 흑설탕 (Black Sugar)
- 특징: 당밀 함량이 높아 매우 촉촉하고 덩어리져 있기 쉽습니다. 당밀 특유의 매우 강하고 스모키한 향(혹은 흑당 향)을 가집니다.
- 장점: 요리에 진한 색과 독특하고 깊은 풍미를 부여합니다.
- 요리 활용법:
- 색을 진하게 내야 하는 요리 (찜닭, 갈비찜, 장조림).
- 흑설탕 특유의 향이 필요한 전통 과자 (약과, 약식).
- 계피(시나몬)와 궁합이 좋아 수정과를 만들 때 사용됩니다.
- 베이킹 활용법:
- 진저브레드 쿠키, 흑맥주 케이크, 스파이스 케이크 등 강한 향신료와 어울리는 베이킹에 필수입니다.
- 결정적 차이: 당밀은 수분을 끌어당기는 성질(흡습성)이 강합니다. 따라서 흑설탕을 사용하면 쿠키가 바삭하기보다 쫀득하고(Chewy) 촉촉하게 만들어집니다. (4번 글 ‘겉바속촉 쿠키’의 핵심 원리)
3. 베이킹에서 설탕을 바꾸면 안 되는 이유
요리는 황설탕 대신 백설탕을 넣어도 맛의 큰 흐름을 해치지 않지만, 베이킹은 다릅니다.
레시피에서 백설탕을 쓰라고 한 것을 흑설탕으로 바꾸면, 단순히 풍미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결과물 자체가 달라집니다.
- 식감의 변화 (바삭함 vs. 쫀득함): 위에서 설명했듯이, 백설탕은 바삭함을, 흑설탕은 쫀득함을 만듭니다.
- 팽창의 변화 (산도): 당밀은 약한 ‘산성’을 띱니다. 만약 레시피가 알칼리성인 ‘베이킹 소다’를 사용한다면, 흑설탕의 산성이 베이킹 소다와 만나 더 활발하게 가스를 발생시켜 팽창에 영향을 줍니다.
- 색과 풍미의 변화: 백설탕으로 만들어야 할 바닐라 케이크에 흑설탕을 넣으면, 바닐라 향 대신 강한 당밀 향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색도 어둡게 변합니다.
이제 세 가지 설탕의 차이가 명확해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좋고 나쁨’ 혹은 ‘건강함’의 척도가 아니라, 각각의 목적을 가진 ‘서로 다른 도구’입니다.
- 깔끔한 맛과 색이 필요하면 백설탕.
- 은은한 풍미와 감칠맛이 필요하면 황설탕.
- 진한 색과 풍미, 쫀득한 식감이 필요하면 흑설탕.
이 원리를 이해하고 각 설탕의 특징을 목적에 맞게 활용한다면, 여러분의 요리와 베이킹은 훨씬 더 정교하고 깊은 맛을 내게 될 것입니다.